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팔 전투 (문단 편집) === 작전 중지와 백골가도 === 5월 말. 임팔 북부를 공략하던 일본군 제15사단도 병사들이 인근 마을을 약탈(할 수 있던 일본군 부대는 차라리 운이 좋았을 정도)하거나 보급품을 자체 조달하기 위해서 진지를 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6월 22일 33인도군단이 포위망을 뚫고 임팔의 제4군단과 상봉함으로서 일본군의 우호작전은 사실상 끝이 났다. 무타구치 중장은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일본군 제33사단에 보충병 1개 연대를 보강시켜 인도군 제17사단 지역을 돌파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일본군 제15사단과 야마모토 부대도 더 이상 공격을 펼칠 능력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6월 말, 마침내 무타구치는 작전 중지를 결정하고 그 뜻을 방면군에 올렸다. 그러나 방면군은 이런 소극적인 의견을 접할 줄은 몰랐으며 오히려 제15군에 계속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 이유가 정말 가관인데, 무타구치가 절망과 죄책감에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한 카와베 방면군 사령관이 일부러 공격 명령을 내려 무타구치의 기분을 맞춰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타구치가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부대가 움직이지도 않는 사태에 직면한 상황에서 작전 중지 외에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없었다. 방면군은 마닐라에 주둔하고 있던 남방군에 고급 참모를 파견하여 작전 중지의 의향을 전달했다. 7월 2일, 마침내 남방군은 임팔 작전의 중지를 방면군에 명령하게 된다. 결국 작전 개시 4개월이 지난 7월 3일 우호 작전을 중지하고 투입했던 부대를 모두 철수시켰다.[* 카와베에 따르면 작전 중지를 생각하기 시작한 지 2개월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 가져갈 수 없는 무기와 장비는 모두 버렸으며, 심지어 움직일 수 없는 중상자와 병자들도 버리고 철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거동이 가능한들 상당수가 굶주림과 말라리아와 [[이질(질병)|이질]]성 장염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상태라 철수는 더딜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수풀과 공중에서 날아드는 영국군의 일방적인 공격에 당하거나, 정글에 우글거리는 호랑이와 표범의 먹잇감이 되거나, 몇몇은 절망 속에 총칼이나 수류탄 등으로 자살하고, 심지어 홀로 낙오되거나 죽어가는 병사들을 상대로 [[식인]]까지 암암리에 자행되는 등[* 아래 '전율의 기록 임팔작전' 참고.] 사실상 무질서한 패주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영국군]]의 기동병력이 추격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전사자와 아사자, 병사자의 시체들을 마주했는데, 열대 우림의 습하고 더운 기후와 [[파리(곤충)|파리]] 떼 때문에 이들의 시체는 사흘만 지나도 피부가 다 썩고 파먹혀서 육탈(肉脫)[* 시신의 살점이 모두 없어져 백골이 드러난 상태. [[한국]]에서 시신을 땅에 묻으면 7년에서 15년 정도는 지나야 육탈이 된다.]이 된 상태였다. 게다가 코를 찌르는 악취까지 더해져, [[영국군]]은 [[전염병]] 창궐을 우려하여 추격을 멈춘 뒤 생사를 불문하고 [[석유]]를 끼얹어 길가에 널부러진 일본군들을 소각처리했다. 한편 패주중인 일본군들 역시 하얀 뼈가 드러난 동료들의 시체들을 마주하고 '백골가도(白骨街道)' 또는 '야스쿠니 가도(靖國街道)'라고 불렀다. 전사자의 이름은 모두 [[야스쿠니 신사]]의 영새부에 남으니까 죽어서 야스쿠니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게 빈말이 아닌 것이 당시 [[일본군/군가]] 중 하나인 도키노사쿠라, 즉 [[동기의 벚꽃]]이 이 내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